게들의 전투
 

(바다산책 펜션 부근 '영화박물관' 가는 산책 길의 해안 경승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젯 밤에 여유분 바닷물을 페트병에 담아와서 게를 잡아넣어 둔 아이스박스에 많이 부어 넣어줬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마리의 게들이 시들시들해져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들의 자연학습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것은 이 게들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라는 생각에 일단 이놈들을 바닷물에 풀어주기 위해 가까운 해변으로 갔습니다. 함덕에서 잡았던 게와 조개들도 그날 밤에 펜션 앞 바닷물에 풀어줬었는데, 이번에는 하룻 밤을 넘겨버린 것입니다. 거친 암벽 사이 물결이 잔잔한 곳에다 이들을 쏟아부어 아이스박스를 비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곁에 앉아 게들의 동태를 관찰해보기로 했습니다.

거의 다 살아있는 줄 알았는데, 웬걸, 맑은 바닷물 속에 가라앉은 게들이 전부 배를 하늘로 까고 뒤집어진 채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이렇게 많은 살생을 범하다니... (게 찌개 끓여 잡아먹기까지 하는 주제에) 헌데 잠시 지켜보고 있다보니, 한 마리, 두 마리씩 몸을 제대로 가누고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바닷물에 쏟아지는 순간에 기절했었던가 봅니다. 그중 가장 큰 녀석들은 활기차게 게 헤엄을 시도하며 새로운 살 곳을 찾아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녀석들이 금릉 백사장에서 살던 새하얀 게들이라, 시커먼 현무암 해안인 이곳에서는 금세 눈에 띄기 때문에 생존 보장에 심각한 핸디캡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것도 다 너희들의 팔자인 줄 알거라 뇌까렸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많은 놈들이 살아남기를 바래봤습니다.

바로 그때, 이 구역의 터줏대감들이 나타났으니, 바로 시커먼 색깔의 게들이었습니다. 이 검은 게들은 몸이 쇠약해져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거나, 아니면 아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방인 하얀 게들에게 다가가더니 집게로 집어 어디론가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동종 생물을 잡수시려는 캐니벌리즘(cannibalism)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다른 곳으로 이주해가는 것으로 보였던 제일 덩치 큰 흰 게 두 녀석이 자신의 동지들이 힘없이 늘어져서 검은 게들에게 끌려가고 있는 이곳으로 되돌아 오더니, 용맹하게 검은 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인 침입자의 덩치에 밀린 검은 게들은 바위 속 제집으로 퇴각하더군요. 도대체 흰 게들이 왜 되돌아와 제 동족들을 구해준 것일까? 단순히 검은 게와 구역다툼의 전투를 벌인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동족을 구해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게들처럼 지능이 낮은 생물들에게도 동족 보호정신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자기 구역, 영역, 소유권 같은 것들은 생물 개체의 본능으로 각인돼 있는 것일까?

바다산책 펜션은 여러 가구가 한 정원을 나눠쓰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집의 아이들이 한 정원에 어울려서 뛰어놉니다. 사회적 공격성(aggressiveness)이 지극히 희박한 저의 딸들은 그 구조 속에서 이미 두 번을 다른 집 아이들로부터 공격적인 대응을 당했습니다. 정원을 가로질러 뛰노는 제 딸들에게 다른 집 아이들이 '우리 구역'으로 넘어와선 안된다고 경고를 하고, 자신의 구역 내의 그네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등의. 한 번은 외출 후 펜션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방 앞에 다른 집 아이들이 모여있다가, 제 딸들에게 이곳이 자신들이 들어가 잘 집이라는 주장을 하더군요. 제가 다가가 열쇠로 방문을 열며, 무슨 일로 그러냐고 미소를 띈 채 그 아이들에게 말을 건넸지만, 걔들은 시커먼 썬글래스 낀 어른은 두려웠던지, 적의가 가득 찬 시선만 남기고 말없이 제 부모들 쪽으로 떠나갔습니다. 열 살도 채 안됐을 그 아이들, 펜션에 놀러올 정도의 사회경제적 여유가 있는 아이들일 텐데, 왜 그렇게 자기 구역과 '자기 것'을 호전적으로 차지하고 지키려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헌데, 언제나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지요. 우리 사회의 자기 것 지키려는 두려움과 탐욕을 아이들도 죄다 물려받을 수밖에요 - 뭐, 제 딸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의 공격적인 행동은 빼앗기기 싫다는 두려움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자기 구역'에 대한 관할권 주장은 '동물의 왕국'과 같은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듯이, 거의 모든 짐승들의 본능적인 행동원칙인가 봅니다. 인간이라는 생물의 경우, 이러한 본능적 성향이 거대한 집합체 수준에서 발현된 것으로 애국심의 '어두운 한 쪽'면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애국심의 '밝은' 측면을 매우 긍정적으로 봅니다만(일례로, 황우석 교수의 '국경 없는 과학, 조국 있는 과학자'의 개념에 찬동합니다), 애국심이라는 정신 현상 속의 배타적 민족주의라는 부분은 생물체의 자기 구역 보호본능과 매우 근접해있는 '덜 진화된' 인간의 속성일 것으로 간주합니다. 쉽게 말해서, 나라 사랑하자는 마음 속에는 짐승처럼 자기 구역만을 집요하게 지키자는 본능도 담겨 있을 것이란 말이지요. 그런 야수에 가까운 부분들을 가려내고 떼어내는 것이 진정한 애국심 고양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저 자신을 비롯해 한국의 많은 동포들은 이런 '야수성'을 여전히 많이 간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가 간의 축구 경기에서 우리의 '태극 전사'가 골인을 시킬 때, 얼마나 기쁩니까? 온 나라가 기뻐합니다. 저도 기뻐합니다. 한 밤중에 집집마다 환호성이 터져나옵니다. 매우 부끄러운 고백입니다만, 지난 2002년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친구들과 호프집에서 대형 화면 TV로 경기 중계를 시청하던 중이었습니다. 게임이 아주 안 풀려 우리 팀의 패색이 짙어졌을 때, 방광에 축적된 액체를 방출하기 위해 화장실에 들렀다가 알딸딸한 취기 속에서 몰래 신께 기도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팀 이기게 해달라고.

사랑하는 내 민족에게 승리의 영광이 안겨질 것을 기원하는 게 왜 부끄러운 일이냐구요? 글세요... 그런 구약성경적 멘탈리티에 기초한 기복성 기도는 다시는 입에 올리지 않고 싶고... 무엇 보다, 나의 승리는 남의 패배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승리했고, '그들'은 패배했을 때, 나는 우리의 환희에만 나를 감정이입 시킴으로써, '그들'의 비탄은 완전하게 외면하는 것이지요. 그보다도, 이런 '게임'에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것이고, 그것에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것은 그 순간에 느끼고 그쳐야 할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것임에도, 그 얄팍한 쾌락을 위해 전지전능하신 신의 힘을 청원했다는 것은 저 자신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기억입니다. (다른 사람도 저처럼 그렇게 느껴야 한다는 뜻은 전혀 아니고.)

축구 경기의 승패에서 느끼는 희열과 실의는 원초적 본능 쪽에 가까운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DNA에 각인돼 있을지도 모를 정도의 강력한 본능적 성향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성향이 짐승들이 제 구역 지키려고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본능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는 말입니다 - '그들'의 눈물이 나의 기쁨일 수밖에 없으므로. 평균적 수준보다 훨씬 앞선 의식을 믿는 이들은 심지어는 타생명체를 무시한 인간중심적 사고방식까지도 편협하다 비판합니다. 지고한 '인류애'조차도 '생명애'에 비하면 이기적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만물이 중생이라는 견해에 이르면, 인간의 생명만 돌보는 것이 반드시 위대하기만 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물며, 제 민족, 제 식구만 지키려는 마음은 얼마나 편협한 것일지... 그리고 그 편협성을 버리지 못하는 나라는 수행자 또한 얼마나 덜 여문 중생인지...

언젠가 외국에서 만난 한 한국인 뱃사람은 동포와의 만남을 진정으로 반가워 했습니다. 그런 진심을 저는 애국심의 밝은 부분으로 생각합니다. 헌데, 그 전날엔가 고국에서 행해진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해 제가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것을 확인한 그 사람은, 금세 태도가 바뀌어 저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대하더군요. 저는 스스로 내적으로는 순수한 애국자라고 자부하지만 정치 쪽에는 별로 관심이 없을 뿐인데, 그런 개인적 성향이 그 사람에게는 '같은 구역을 지키는 동포'로서의 자격을 부여해줄 수 없는 조건으로 여겨졌던가 봅니다. 그 사람의 애국심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애국심이라는 감정이 넓은 시각과 이성을 활용한 정련 과정을 통하여 똘레랑스 정신과 함께 가는 편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엄청나게 다양한 이질성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면서도 자신 만의 개성의 아름다움을 가꿀 수밖에 없으니까요(그래서 정치적 무정부주의자가 진정한 애국애족자일 수도 있다는 역설까지도 수용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바닷 물 속의 하얀 게와 검은 게에게는 그런 업그레이드를 요구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인간은 아마도 게들 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일들을 처리하라고 태어난 존재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