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마지막 날의 오후
 

여행 닷새 째날, 게들을 바다에 풀어주고, 펜션의 정원 식탁에서 파도 소리 들으며 아침 식사를 한 후, 짐을 꾸려 새로운 곳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차에 짐 나르는 것을 도와준 펜션의 송사장님은 '정들만 하니 이별이네요'라는 여운의 인사말과 함께 환한 미소로 우리를 떠나보냈습니다. 꼭 또 와야지 마음 먹고 바다산책 펜션을 떠났습니다. 이 펜션 주변에는 '해안 경승지'라고 이름 붙여진 산책로가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오 분여쯤 걸어가면 '영화 박물관'이란 곳이 나오고, 입장료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이곳에는 '죠스'와 '티렉스'를 비롯하여 다수의 영화 주인공 복제 전시물들이 있어, 아이들 사진 찍어주기에 알맞습니다. 이곳을 떠나 우리 가족은 서귀포의 천지연 폭포에 들렀고, 그 다음으로는 점심 도시락 까먹을 곳으로 중문에서 화순가는 길 도중에 위치해 있는 안덕 계곡을 택해 떠났습니다.

안덕 계곡은 그다지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고, 과거 신혼 여행 왔을 때 아내와 들러 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 이 고요한 계곡의 수려함과 신비로운 분위기에 매료되었었기에 다시 찾았는데, 이번에는 많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제주 관광 발전 청사진에서 이곳이 찬밥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계곡 주변의 여타 관광 시설들 개발의 후유증이 이곳의 빼어난 자연 경관을 훼손해버린 흔적이 많이 엿보였습니다. 계곡물의 양도 보잘 것 없었고, 주변의 거친 모습들로 인해 예전의 고즈넉한 매력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계곡 한 귀퉁이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점심 밥은 잘 먹었지만, 아쉬움을 뒤에 남긴 채 그곳을 떠났습니다. 미래에는 이곳이 되살아나기를 희망해봅니다.

이후에 우리는 시원하고도 아름다운 제주 산간도로를 거쳐 제주시 근처의 '제주 수목원'을 잠시 구경하고 제주 공항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이호 해수욕장으로 향했습니다. 위의 사진에서처럼 이호의 해변에서 '파도로부터 도망치기 놀이'를 하며 잠시 뛰어놀던 아이들은, 이내 엄마와 함께 썰물로 드러난 갯벌을 파헤치며 게와 조개잡이에 열중했습니다. 작년에는 마지막 날 잡은 꽤 많은 게들을 숙소에 가져가 찌개로 끓여 먹어치웠지만, 이번에 잡은 놈들은 금세 도로 놓아주었습니다. 애들이 게가 불쌍하다며 �릴附坪� 악어의 눈물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내심, 익힌 새끼 게들을 와작와작 씹어먹고 싶었습니다만.

우리는 이호 해수욕장의 화장실에서 발을 씻은 뒤, 제주시의 용담동 해안에 자리잡은 '아리스토캣'이라는 모텔 비슷한 펜션에 묵기로 했습니다. 바로 작년에도 제주의 마지막 밤을 보낸 숙소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택시로 편하고 빨리 공항으로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저는 아침 일찍 차 몰고 배타러 떠나야 하므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전망도 훌륭한데다, 내부 시설도 매우 깔끔하게 잘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이곳을 다시 찾았습니다. 숙박비도 저렴한 편이지만, 단 하나 흠이라면 도로에 접하고 있어 늦은 밤에도 차 다니는 소리가 시끄럽다는 점을 들겠습니다. 허나 에어컨 틀고 창문을 닫아버리면 방음 효과는 좋습니다.

작년과 똑같이 생긴 방에서 작년과 똑같이 제주도의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 작년처럼 아이들은 침대에 앉아 DVD를 봤고, 엄마는 저녁상을 차렸으며, 저는 짐을 챙기며 맥주나 마셨습니다. 데자부(deja vu)가 되어버렸습니다. 식구들이 잠들고 난 뒤, 혼자 빠져나와 해안 산책로를 거닐었습니다. 저 앞 바다에 오징어인지 한치인지를 잡으려고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조업중인 배들이 여러 척 떠 있었습니다. 저들은 이 밤에도 열심히들 일하고 있구나. 문득, 집으로 돌아가면 쌓여있을 산더미 같은 일감이 떠올랐습니다. 그럼에도, 그날 밤 역시 아주 편히 잘 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