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확장 (2006/7/12)
©
Suk Hoon Han
나는
타고난 소심함에도 불구하고 때로 겁없이 일상으로부터 일탈해버린다.
십대였다면 문제 청소년이 될 소지를 많이 갖고 있는 인간이라 하겠지만,
다행히 십대 시절은 예전에 통과했고, 성인이 된 이후로는 자신의 일탈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실은, 이제는 일탈이
선사하는 창의적인 일상의 전개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일탈로
인하여 내가 창의로워진다는 말이 아니라, 평소의 반복으로부터 벗어난
일상 그 자체가 창의로운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말이다. 어찌 보면
이런 말은, 내가 삶의 주인이라는 능동적인 자세라기 보다, 나를 삶의
흐름에 내맡기는 수동적 자세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상관없다.
능동성과 수동성에 대한 현상계의 고정관념이 영성의 차원에서는 정반대로 뒤집혀버리곤
한다는 것은 내가 얻은 중요한 지식 중의 하나이다. 이는, 내맡기고
죽겠다 하면 살 것이요, 살겠다고 도망치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이순신의 가르침과도
같은 것이다. 내맡기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태도가 실은
가장 능동적인 삶의 자세라는 역설에 대해 소소히 설명하는
것은 멋대가리 없는 일일 듯 하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나의
일상은 소박하고, 나는 소박한 소시민적인 일상 속에서 때로 자그마한
일탈을 저질러보는 정도에 불과한데, 그러한 일탈 중에는 나 자신을 다수의
비평 앞에 까발려버리는 행동이 포함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그랬던
기억들이 있다. 초등 5-6학년 즈음, 학교가 파하면 나는 죽마고우 악동들과
일부러 먼 길을 택해서 한 시간은 걸려 집으로 걸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하교 길은 다양한 일탈의 실험장이었고, 나의 '학생의 본분을 벗어난'
행동이 당시 착하게 학칙을 준수하는 학생회 간부 아이들에게 포착된
적이 있었다. 결국 나는 전체 학생회의에 홀로 출두당하여 학생
대의원들 앞에서 나의 죄목 - 불량식품 취식, 위험한 도로상의 제기차기
등 - 을 자백할 것을 종용받았고, 몇 명의 증인 학생들은 나의 죄목에
대한 보충 증언을 진술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 학생회의는
한 목소리로 나를 질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피고자 단상에 서서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다가, 아무 말 않고 그냥 걸어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뭐라고 변명하고 항변하거나,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마음도 전혀 없었다. 기억나는 것은 이것 하나, '거 재미있네!'하는
기분. 말하자면, 나의 일탈이 유발한 학생회의 출두라는 또 다른
일탈을 경험한 것 자체가 재미있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여하튼 나는
'범생이' 학생회 간부들을 속으로 비웃으며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었던 것이 기억난다.
생각해보니 이와 비슷한 경험이 꽤
여러 번 있었다. 그중에는 고3때 학급토론에서 도발적인 발언을 하여
일종의 왕따가 됐던 일도 포함된다. 그때는, 나는 국가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주장했다가 많은 욕을 얻어먹었다. (당시는
여전히 '국민교육헌장'의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구절의 영향력이 잔존하고 있었는데, 나는 나의 어린
머리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나의 출생이라는 자연적 - 또는 우주적
- 현상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또는 정부가 의도적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냥 생명체인 내가 먹고 살려고 태어나버리는
거지, 뭐.) 국내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집단 행동에 참여하지
않고 혼자 숲속에서 음악이나 들으며 누워 있고, 단체로 출석거부키로
결정한 수업에 뻔뻔하게 출석해서 앉아 있었던 것 등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옛 기억이 또 다른 기억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재생시킨다. 이렇듯 '공공의 적'이 되어 공개 비판을 당했던
경험은 이밖에도 몇 번 더 있었다.
심약하고 소심했던 나이지만,
이런 경험들을 통해 상처를 입었던 기억이 별로 없다. 물론 평소에는
겪지 못했던 체험을 한 것이기에 그 기억이 뇌리에 단단히
새겨지기는 했었지만, 그러한 경험들 때문에 슬프거나, 화가 나거나,
분했던 기억이 전혀 없다. 오히려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당시의 나의 반응은, '거 재미있네!'였다. 그런 경험들을 즐겼던 것을
기억한다. 다수 대중의 비판 앞에 서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우스워서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가 비판자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던
적도 있었다. 나의 비판자들의 주장이 한심스럽게 들려서 그에
대한 비웃음이 밖으로 삐져나온 측면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일탈의 체험을
즐기고 있었던 연유가 더 컸던 것 같다. 나의 비판자들이 나를 물리적으로나
법적으로 응징할 아무런 장치를 지니고 있지 못했던 탓에 나는 그렇게
겁없이 즐길 수 있었을 게다.
그러나 미국의 대학원 시절에 나의
주장이나 페이퍼를 세미나 등에서 제시하고, 그에 대한 다수의 비평에
응답하는 일은 그다지 만만하게 웃음 지으며 즐길 수 있을 만한 경험이
못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지금도 나의 학생들을 비판하는 일이
거의 없다 - 오류 지적은 해주지만. 어언간 나이를 먹어 선생질을
하고 있는 지금, 괜히 심심해서 예전의 일탈의 추억을 되살려보고픈
마음이 일었는가 보다. 수업시간에 나의 학생들에게 내 글을 제시하고,
그 글을 비판해보라고 주문하였다. 나 자신을 타인들의 공개적
비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마조히스트성 굴레가 어느새 나라는
인간의 하나의 습성이 되어버린 것일까? 허나 교육적으로 말하자면,
선생의 글을 비판해봄으로써 학생들이 평가라든가 비평이라는 행위에
대하여 색다른 통찰을 획득할 수 있기를 바랬었던 게 거짓은 아니다.
나의
글을 학생들로 하여금 비판토록 하는 활동을 올해들어 두 번 시도해봤다.
나의 '수행일상'들 중에서 종교적으로 별 문제 소지가 없음직해보이는
글들(ⓐ,
ⓑ)을
뽑아서 공동비평 자료로 삼았다. 선생의 글임을 학생들에게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소중한 학생들은 신랄하였다: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문체에 일관성이 결여돼 있다,' '영문 번역어투가 거슬린다,'
'구성이 비효과적이다,' '논리의 비약이나 급작스런 전환을 납득할
수 없다' 등등.....
고백컨대, 나는 피학성 도착 성향을 보유하고
있지 아니한다. 따라서 '나'의 글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비평의 따끔함을
조금도 즐거워하지 아니한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의 글에
대한 타자의 비판이 마치 '나' 자신에 대한 비판인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글이 됐든, 아니면 '나' 자신이 됐든 간에, 남에게서
비판 좀 받으면 그게 대수인가? 비판받아 상처받는 '나'는 껍데기
'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그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은 학생들의 비판이 선사한 따끔함이 수초 내에 사라져버리고, 따라서
'나'에게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바로
이런 식의 문체가 '귀에 거슬리는 번역어투'라고 학생들로부터 누누히
지적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 따위로 글을 쓰고 있다.) 헛된
나의 에고가 상처입을 것을 애초에 익히 짐작하고 예상한 상태에서
시도한 수업 활동이었다. 결론적으로 나의 에고의 상처는 금세 씻은
듯 사라져버렸으나, 선생을 타겟으로 삼아 쏟아낸 자신들의 비판에 학생들
스스로가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런 활동 두 차례 다,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해보고자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던졌다. 비판받은
내가 비판자들을 위로해줘야 할 것 같았다.
냉정한 영어 표현,
"No hard feelings"란 말이 입가에서 맴돌았다. 사감(私感)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이다. 학생들이
나에게 해줬어야 함직 한 말을 왜 내가 뇌까리고 있는가? 그야말로 냉정한
영어 표현, "Cool"이 내 심정을 잘 대변해준다. 기분 좀 나쁘면
어때? 대수롭지 않은 걸 갖고 말야. 느끼고, 나누고, 배우면 됐지 그깟
에고의 기분 좀 상하게 한 게 큰 문제인가? 진정으로 나는, 선생의 글을
비평해준 용기있는 학생들의 참여를 고마워 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학생들이 무언가 가치 있는 통찰을 얻어갈 수 있으리라 예상하며
고마워 했다. 나의 의무인 수업에 학생들이 도움을 준 것을 고마워 했다.
오히려 학생들이 어색해 했다. 내가 실은 이러한 일탈된 수업 활동을 '거
재미있네'하는 태도를 가지고 은밀히 즐기고 있다는 것을 학생들은 모르기
때문일 게다.
두 차례의 공개 비평을 통하여 내 글의 수많은
결점들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 이도 하나의 수확이지만, 나의 길벗님들
중에서는 내 얘기를 듣고 비판당한 나를 위로해주시는 분들이 있었다.
어린 학생들이 아직 뭘 잘 몰라서 그런다는 말씀으로. 겸손과 오만을
겸비한 나는 길벗님들의 위로의 변을 전적으로 배격하지 아니한다: 그래,
아직 젊어서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일 수도 있지... 허나 겸손이나
오만을 떠나서, 나는 위로받을 필요가 전혀 없거늘. 혹 모르겠다, 다음
학기에는 제일 잘 쓴 내 글을 학생 비평의 재료로 고를지, 그래서 가능하면
비판의 소지를 애시당초에 줄여볼런지.
일상의 일탈이든 수업의
일탈이든, 루틴(routine)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나에게 예상 못한 경험을
가져다 준다. 그런 경험들은 나의 자아를 확장시켜 준다: 평소에 모르고
지냈던 나의 다양한 속성들과 대면하도록 해주므로. 일탈은 루틴의
안전을 깨뜨리기에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으나, 하찮은 상처를
겁냈다가는 자아 확장의 행복은 맛볼 수가 없다. 정답이 없는 개방된
사고의 토론 수업은 선생인 나도 미처 대비하지 못한 질문을 유발시켜
알량한 나의 체면을 위협할 수 있으나, 토론 없이 지정된 지식
콘텐트만 전달하는 수업만으로는 학생과 함께 크는 행복을 맛보기가
어렵다. 학생들의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여 내 글도 좀 쉽게 쓰려
한다. '자아 확장'이라는 용어도 '나의 그릇 키우기' 정도로 바꿔써야
하는 것 아닐까 모르겠다. 어려운 단어는 나처럼 뭘 잘 모르는 인간들이나
쓰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잘난 척 현학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잘 모르기 때문에 어려운 단어들을 여전히 붙잡고 있을
뿐이다. 나도 더 잘 알아 갈수록 쉬운 단어를 쓸 수 있으리라. 어쨌든
나는 오늘도 이기적인 기복성 기도나 올리련다: 주님, 자아 확장의
기회를 주는 일탈을 저지를 수 있는 용기를 저에게 자꾸 자꾸 주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