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통신 (2009/8/17)
©
Suk Hoon Han
8월에는
독특한 느낌이 있다. 폭염, 새하얀 뭉게 구름, 이마에 송송 배는 땀방울,
농염의 극치에 다다른 푸르른 수목들, 엄청나게 큰 소리로 대낮의 공간을
점령해버리는 매미 울음소리, 그리고 그 매미 소리가 느닷없이 그쳤을
때 내리쬐는 태양 아래의, 마치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과 같은 놀라운
적막감. 열살 쯤 먹은 소년이었을 때 어느 시골에서 봤던 그러한
8월의 대낮은, 이제 돌이켜보니 시·공간 속의 나의 '있음'을
자각케 해준 존재론적 경험이었던 것 같다.
어제 학원이 여름
휴가여서(방학 동안 수입이 없어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처남
부부네와 동반하여 충남 금산 쪽으로 1박 피서를 다녀왔다. 국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불경기인 이 시절에도 여행은 꼭 다녀야겠기에, 경비의
대폭 절감을 위해 두 집이 뭉쳐서 한 차에 다 싣고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긁어 사모은 부품들과 집에 있던 낡은 이민가방을 개조해서
내 차 천장 위에 일종의 '차량용 백팩'을 만들어 붙였더니, 두 집 식구 7인용의
짐을 다 싣고도 넉넉히 한 차에 타고 다닐 수가 있었다. 이는 또한 경부고속도로의
버스전용차선을 이용하려는 의도 하에 고안된 것이기도 했는데, 덕분에
주말 여행을 교통체증 한 번 안 겪고 편히 다녀올 수 있었다. 용담호반의
단골 펜션에서 하루 묵으며 삼겹살 구워 포식하고, 부근의 운일암반일암
계곡과 적벽강변에서
아이들과 두 차례 물놀이를 했는데, 거의 돈이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시원하게 즐길 수 있어 매우 알찬 1박2일 피서 여행이 됐다.
비용
절감 목적으로 금요일 밤 하루만 펜션에서 묵고 토요일 심야에
귀가했더니, 조금 피곤하긴 했다. 월요일부터는 또 일 나가고 바빠질
것이기 때문에 일요일 반 나절은 푹 쉬기로 했다. 아이들과 늦은 아침
식사를 할 때 이탈리아의 영화음악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의 연주
실황을 담은 DVD를 틀어줬다. 서양 오케스트라 연주를 음질 좋은 DVD로
시청하는 것은 꽤 재미있는 일이어서 어린 딸들도 좋아한다. 우리 집에는
큰 화면의 '벽걸이' TV도 없고 홈 씨어터도 없지만, 내가 용산에서 사다가
브라운관 TV에 갖다 붙인 컴퓨터 스피커만으로도 훌륭한 음악감상이
가능하다. 연주회 중간에 한 소프라노가 천사처럼 우아하게 노래를
할 때, 빵에 잼을 바르던 둘째 나나가 말했다: "우와, 노래
잘 한다!" 그래서 내가 답했다: "그래, 심지어 아빠보다도
잘 부른다, 그치?" 나나는 금세 받아친다: "그럼, 훠얼씬!"
나는 딸을 째려보고, 딸은 킥킥거린다.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이
흐르고, 8월의 아침 바람이 거실을 훑고 지나갈 때, 어제의 물놀이 여행
덕분에 고단한 몸으로 단잠을 이룬 뒤에 일어난 식구들은
조용히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다. 일상 속의 완벽한 행복의 순간이 이럴
때이겠거니 싶다. 빵을 씹고 커피를 홀짝이며 평화로이 그런 순간을
즐기면 된다. 그러나 순간, 나의 머리속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일어난다:
'이런 완벽함은 곧 깨질 뿐이지 않는가? 어쩌면 현실로만 남아 있기에는
지나치게 평화로운 순간 아닐까? Too good to be true? 어쩌면 내가
죽을 때가 다가온 건 아닐까? 어젯 밤에도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우리
차 앞으로 들이닥친 차 때문에 큰 사고가 날 뻔하기도 했잖은가. 혹시,
이러다 정말 내가 죽어버린다면? 그건 안 되는데, 난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아. 책도 써야 하고, 또 애들 키우고 학교 보낼 돈도 벌어야
하고, 당장 이번 달 카드 사용료도 계산기를 두드려 봐야 하고...'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고의 주책스런 확산이 이쯤에 이르자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던 한 생명보험 상품 광고가 떠오른다. 광고의 주인공은 드라마
'허준' 역을 맡았던 배우 전광렬 씨였는데, 어린 딸과 단란한 한 때를
보내던 그가 문득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이며, 보험 상품의
구매를 통해 마음의 평온에 이른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의 내 모습이
꼭 광고 속의 그 사람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행복의 순간을
즐기지 못하고, 행복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불행에 대한 더 깊은
걱정에 빠지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 그야말로 신께서 행복을 갖다가
안겨주어도 그 행복을 즐길 수 없는 바보가 아니겠는가. 신께 감사를
올리기는커녕. (실로, 이런 게 진짜 '신성모독'이 되겠다.)
나의
걱정들은 진실인가? 합당한가? 근거 있는가? 아마 조금은 합당하고 근거
있는 진실을 포함하고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걱정의 원동력이
진실을 추구하려는 인식 욕구도 아닐 뿐더러, 대체로 근거없는 부당한
두려움의 지배하에 놓여있었음은 나 스스로 아주 잘 알 수 있다. 나는
그저 내 삶에 주어진 숱한 선물들을 잃을까봐 두려워 하는 유치한 기분에
사로잡혔을 뿐이었다. 그것을 금세 알아차렸기에 그 기분에서 빨리 발을
빼버릴 수 있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진실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진실을 가능한 한 빨리 받아들일 것이 해탈의 길에서 요청될 것이다.
일상
속의 완벽한 행복의 순간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어떠해야 할까? 실로
간단하다: '두려워 말고 그냥 그대로 있으라! 오로지 행복감으로써만
있으라!' 그것이 선물을 주신 신께 감사를 올리는 유일한 길이다. 어차피
일상의 흐름은 조만간 어두운 굴곡을 통과할 것이고, 불편하고 때로
아프기까지 한 그 굴곡에서 나는 정신을 집중시켜 숨어있는 빛을 찾아내야
할 것이니, 그 힘겨운 순간을 위해 살가운 지금의 평화 속에서 에너지를
충전함이 옳지 않겠는가.
열살 무렵의 나는 8월의 태양 아래에서
나의 '있음'의 불가해한 까닭에 대한 상상의 시초를 더듬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상상은 학문과 종교와 수행 등, 여러 가지 이름의 도구들을
통해 진행돼왔었고, 지금 나는 그 상상에 대한 답을 일부분 전해주신
신께 감사하며 매일을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답이 '일부분'일 것이라고
상상함에 대하여 조금도 불만스러움이 없다. 그 일부분보다 아주 조금만
더, 내 몸뚱이에 숨이 붙어있을 동안 알아낼 수 있다면, 그로써 지극히
고마워 할 일이겠다. 나에게 일상은 그러한 모색이 살아 숨쉬는 무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