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정령
 

 © Suk Hoon Han                                                                                                                                                                                      

부석사 앞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길을 떠난지 얼마 안돼서 석천정사라는 표지가 붙어있는 계곡이 눈에 들어왔다. 예사롭지 않은 계곡의 모양새에 홀려 차에서 내려 거닐어봤다. 고운 모래와 너른 바위가 어우러진 이 독특한 계곡 줄기를 따라 잠시 올라가니 비밀스러운 골짜기 한 켠에 석천정사라는 유적이 나타났다. 선비들이 공부하고 도 닦던 곳인가 보다. 정사에 이르는 계곡변 길 한 쪽에는 청하동천(靑霞洞天)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하늘 위에 있는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석천계곡에 도깨비들이 몰려와서 노는 바람에 공부하던 서생들이 고통을 받자, 명필 권두옹이 바위에 이 글씨를 새기고 칠을 하여, 필력으로 도깨비들을 쫓아버렸다는 것이다.

권두옹은 17~18세기 유생이므로 성리학을 공부했음에 틀림없으나, 선계를 거론하는 걸로 보건대 어쩌면 도교 사상과도 교분이 있었는지 모른다. 주세붕이 '경'자로 원혼들을 하늘로 올려보냈듯이, 권두옹은 도교적 이상을 담은 글씨로 도깨비들, 또는 원시 자연의 정령들―또는 인간 무의식의 자연스러운 욕망들―을 원시림 안으로 쫓아버렸다. 이 이야기는 유럽의 중세 초기에 기독교가 알프스 산맥 이북의 토착 원시신앙을 몰아내며 세를 확산시킨 역사를 떠오르게 했다. 4세기 이후 전 유럽이 점차 유일신 하느님을 숭배하게 되면서, 기존의 토속적 정령들은 서양문명의 변방으로 추방당했다. 한반도에도 외래의 강력한 종교인 불교, 유교, 도교 등이 유입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샤마니즘과 정령 신앙 등이 변두리로 밀려나게 됐다.

비교종교사적 시각으로는 이렇게 서술할 수 있겠지만, 인간 정신구조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우며 인간적 감정과 교분하는 정령들의 사라짐이란 사람들의 본능과 감정이 담긴 자연스러운 욕구들이 문화에서 소외되고 억압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겠다. 유교 서생들은 왜 딱히 큰 피해를 입히지도 않는 도깨비들의 노는 소리에 괴로워 했겠는가, 바로 도깨비, 또는 정령들이 드러내는 자연스러운 욕망의 분출을 유학자들이 견디지 못했기 때문 아니겠나. 사람의 참된 도리를 구하는 도학혁명의 물줄기인 성리학의 엄격한 수양이 이 땅의 민중의 자연스러운 본성의 발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마저 일어난다. 철학자 김형효 교수가 지적하듯이 무의식에 기반을 둔 욕구의 억압은 실질적 성향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17~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적 지성 추구가 실질적으로 시민 계층의 전인적(全人的) 성숙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고, 이에 반하여 루소는 감정과 욕망과 신앙심 등을 끌어안으라는 주장을 설파했던 정황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