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 읽기 (2021/12/24)



© Suk Hoon Han                                                                                                                                                                            



 

'죽음과 친해지는 삶'과 같은 책을 쓰고 동년배들보다 조로(早老)의 길로 접어든 탓인지 과거사에 대하여 기억이 흐릿해진 것이 한둘이 아닌데, 칼 융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2006년이었던 것 같다. 2002년에 융의 회고록을 처음 집어들기는 했으나 띄엄띄엄 읽다가 여러 해가 지나 이부영 교수님의 분석심리학 저술을 하나씩 정독하기 시작하며 지금까지 꾸준히 융 전집과 관련 서적들을 읽어왔다. 융의 The Red Book은 2014년에 처음 책장을 열고 눈길을 준 이후 7년이 걸린 올해 초반에야 독파할 수 있었고, 한국융연구원에서 번역출간한 융 전집 총 9권 중 마지막 권을 이제 거의 다 읽어가고 있는 중이다. 아직 융의 수제자 폰 프란츠의 책들과 이부영 교수님의 신작 몇 편을 더 읽을 계획이지만, 대강 이걸로 융 사상의 기초 과정 이수는 마쳤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대개의 대가들의 사상 공부가 그러하지만, 특히 융의 사상은 지식과 정보로 머리에 입력하기보다는 삶의 체험을 통해 느끼고 성찰하지 않고서는 통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 학습 장르라고 생각한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며 얼마 전에 읽고 밑줄 쳐 놓은 융의 말씀 한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안의 회색 글은 한석훈이 추가):


인생의 커다란 문제들은 결코 영원히 풀린 적이 없다. 한때 겉으로 해결된 듯이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항상 손실이다. 그것의 의미와 목적은 그것을 해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부단히 그 문제와 씨름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우둔해지고 경직되는 것을 방지해준다. 그래서 자신을 도달할 수 있는 것에 제한함으로써 청년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다만 일시적으로만 효력이 있으며[이를테면 '명문대 입학'과 같은 목표에 도달하는 것으로 청년기에 일시적인 만족만을 얻을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지속적인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존재를 쟁취해서 얻고, 그것의 원래의 성질을 변화시켜서 그 성질이 이 존재 형식에 다소나마 적응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아주 뛰어난 성과이다[이를테면 그 어려운 공무원이 됐는데 관료주의의 틀에 박힌 관습을 따르지 않고 공무원 직이 실로 공공에 다소나마라도 기여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뛰어난 성과라는 말씀]. 삶의 문제는 내면과 외면을 향한 투쟁이며, 자아 존재를 위해서 어린 시절에 투쟁하던 것과 비교될 수 있다. 투쟁은 물론 우리에게는 대부분 어둠 속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유아적 착각이나, 전제들, 이기적인 습관 등이 나중까지 얼마나 완고하게 고수되는가를 볼 때, 우리는 그로부터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예전에 얼마나 큰 강도의 에너지가 사용되었는지를 헤아릴 수 있다[유아기 이래의 성장의 무의식적 짐이 평생에 걸쳐 행사하는 위력을 얕보지 말되, 그런 짐에 굴복하지 말라].

- C.G. 융, C.G. 융 기본 저작집 9: 인간과 문화, 솔출판사 2004, p. 82.


예전엔 단 번에 깨달았다며 도사연 하는 이들에게 귀가 솔깃하기도 했다. 이제는 여전히 너무 힘들다 토로하며 꿋꿋이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만을 신뢰한다. 올 한 해도 거의 모두에게 힘들었겠으나, 모두 꿋꿋이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십사 하늘에 기원한다. 그리고 苦海에서 서로에게 좀더 친절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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