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작은 진전 (2004/3/21)
 

수행의 길로 정진한답시고 딴 일 다 때려치우고 영성 공부를 삶의 주 업무로 삼은지 몇 해가 흐르고 보니, 신앙을 갖기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다른 점들이 하나, 둘씩 식별이 되기 시작한다. 스무 살쯤 까지는 영어 팝송을 들으며 따라서 흥얼거리면서도 가사의 뜻은 제대로 몰랐었는데, 미국에서 몇 년 살다가 우연히 예전의 그 팝송들을 다시 듣게 되었을 때에는, 그 노랫말 하나하나의 뜻이 의미심장하게 가슴으로 파고드는 것을 문득 깨달았던 적이 있었는데, 마치 그때의 기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나의 신앙 수행의 진전을 이전에도 여러 번 고백한 적이 있었다('우리의 선한 본성(1),' '평화로운 나날,' '행복의 의무(2),' '신년의 하루,' etc.) - 어쩔 수 없는 '잘난 척'의 위험을 무릅쓰고. 허나 나는 평소에 반성의 글도 많이 쓰고 있으니 그로써 오만의 효과를 상쇄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제는 벌써 아득한 옛날의 기억과도 같건만, 오, 륙년 전만 해도 내 마음 속에는 얼마나 많은 부정적인 감정의 앙금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던지... 자책, 자학, 집착, 두려움, 증오,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 지금은 그랬었던 나 자신을 상상하기도 어렵다고 말하면 이 또한 얼마나 간사한 사람의 마음이겠는가마는, 정말 그런 것들을 가슴에 그렇게 가득 품고 어떻게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면서 살 수 있었는지 의아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을 살펴보면, 그들 또한 예전의 나처럼 많은 부정적인 감정을 마음에 품고 살고 있지 아니한가. 심신의 건강이란 척도에서 그러한 그들과 나 사이에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전에는 내게도 세상에 '나쁜 놈'들이 참 많았다. 부당하고 부정한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힘과 돈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차서 수많은 약자들을 휘둘러대는 '악인'들을 얼마나 증오했으며 또 그들의 응징을 희구했던가. 심지어 나는 낮에는 사회 과학 공부를 하며 세상의 구조의 숙명에 항복하면서도, 밤에는 상상의 세계에서 유치한 장총찬 - 김홍신의 '인간시장'의 - 이 되어 사회악을 때려부수는 마스터베이션적인 공상으로 잠을 청하곤 했었으니. 그리고 꼭 이런 사회적인 차원의 악당 뿐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에서 나에게 해를 입힌 이런 저런 이들도 죄다 그런 '악인'의 범주에 해당되었었다. 그래서 늘 내 안에는 증오가 맴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생각한다: 중상층 집안 아들로 신체 건강하고, 고등교육 받고, 장가도 간 나의 내면에 그렇게 증오가 있었는데, 내게 주어졌던 그런 많은 좋은 조건들을 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내면에는 얼마나 많은 증오가 자리잡고 있을까...)

아직 제 철도 아니건만 아내가 아이들 먹으라고 딸기를 사왔다. 환호하는 애들 보고 나는 침만 꿀꺽 삼키고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는데, 조금 뒤에 딸기 담은 접시를 보니 이미 하나도 안 남고 다 없어져버린 게 아닌가. 책에 몰두해있던 첫째가 방심한 틈을 타서 잽싼 둘째가 싹쓸어버린 것이었다. 둘째 녀석을 보니, 입안엔 딸기 몇 개가 이미 가득 차서 볼테기는 터질 듯 한데, 양손으로는 커다란 딸기를 세 개나 꾹 움켜쥐고 있어 뻘건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양을 보고는 속으로는 웃음이 터져나올 듯 하는 걸 겨우 참고, 따끔하게 야단을 쳤다. 욕심부리면 나쁜 아이 되고 언니와 사이 좋게 나눠먹어야 착하다며. 둘째는 정말 욕심장이 꼬마다.

허나, 주로 먹을 것에 대하여 드러나는 딸애의 이러한 탐욕이 미운가 하면, 그건 결코 아니다. 탐욕이 몸에 배어 아이의 영적 성장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랠 뿐, 아이의 욕심스런 볼테기와 딸기를 꽉 움켜쥔 손은 귀엽기만 하다. 내 아이의 탐욕을 귀여워 하는 마음의 연장선상에서 사회의 타인들을 바라본다. 그중에서도 특히 '악인'으로 낙인 찍힌 이들을 바라본다. 탐욕으로 가득 찬 수많은 그들이 차마 귀엽기까지는 못하여도, 그들에 대한 예전의 증오는 내 안에 남아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어쩌다 순간적으로 치솟는 증오의 느낌은 내 마음의 밭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허깨비임을 알고 있다. '악인' 같은 건 없다. 나의 연민의 대상이 된 그들이 있을 뿐이다. 오늘도 나는 그들을 연민하여 그들의 영혼을 위한 기도를 올린다.

얼마 전엔가 김용옥 선생의 강연을 텔레비전에서 잠깐 본 적이 있었는데, 때마침 불교의 윤회관을 비판하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똑똑한 도올 선생께서 윤회관의 사회구조적 기원과 윤회에 대한 심리적 의존을 비판하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논의의 논리성이 약했다고 본다.) 그때 도올 선생은 세상에 착한 사람들이 보상을 받고 악인들이 벌을 받는 경우는 보기 힘들고, 그 반대가 상례가 아니냐는 말을 했고, 많은 방청객들이 이에 호응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런 것이 입증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인가? 누가 착하고 누가 악한지를 어떻게 심판할 수 있는가의 심각한 문제는 차치하고 나서라도, 선인(善人)은 불행해지고 악인은 호강을 누리며 잘 산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입증된 적이 있거나, 아니면 입증이 가능한 일일까? 나는 이것이 입증될 성질의 진술이 아니라 인식과 행위의 주체인 '나' 자신이 선택하는 바에 의하여 그 방향이 결정되는 성질의 진술이라고 생각한다. 즉, 어느 쪽으로 믿느냐가 결국 중요할 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선인이 행복해진다는 진술을 믿기로 선택한다. 그 반대의 이치(악인의 행복)에 의하여 지배되는 우주를 믿을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근거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반대를 믿어봤자 내 앞에 펼쳐진 세상만 암울하게 스스로 채색하는 것이거늘, 굳이 무엇하러 그리 하겠는가.

어쨌든 그래서 나는 이제 흥부 놀부 이야기의 교훈을 믿기로 선택하고 산다. 그보다 실은, 선인과 악인을 가르는 판단조차도 안 하고 있기는 하지만, 단순하게 선인이 행복하고 악인이 불행하다고 믿고 산다. 내 눈에는 세상이 그렇게 보인다. 비록 과거에는 도올 선생처럼 세상이 그 반대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권력자들, 엘리트들 중의 '악인'처럼 보이는 이들이 더 이상 증오스럽지 않다. 그저 그들은 자신의 불행을 자초하고 있는 연민의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내면은 평화롭다. 평화롭고 싶다는 목적을 가지고 측은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측은지심을 가지고 살다보니 평화가 깃들었을 뿐이다. 증오지심을 가졌을 때에는 알지 못했던 평화가.

내면의 항구적인 평화는 나의 몸까지도 평화롭게 해준다. 이삼십대에도 내 몸에 붙어 있었던 귀챦은 병들이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만성 지병이었던 축농증은 사라졌고, 비염은 놀라울 정도로 약화되었으며, 이십 년 넘게 달고 살았던 편두통은 완전히 없어진지 오래이다. 소화기 계통도 과거보다 튼튼하고 식욕은 천박할 정도로 왕성하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는 의술에 의존했던 신체의 질환을 하나, 둘씩 정신력으로 치유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느리지만 진전을 보이고 있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특히 '생장의 집'의 메시지로부터 계몽받은 바가 많은데, 차후에 좀 더 상술할까 한다. 물론 영적, 정신적 평화가 수반하는 신체적 건강은 규칙적인 운동에 힘입은 바도 컸으리라 믿는 만큼, 이 현상계에 발딛고 숨쉬는 존재로 내면과 외면 양쪽의 조화가 중요하다 믿는다.

안팎으로 부정적인 감정, 성향들이 현저하게 줄어든 나는, 과거에 비해볼 때 훨씬 나 자신을 위하는 일에 집중할 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축복과 용서를 쉽게 자주 하는 연습을 꾸준히 실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과거에는 뒷차가 내 차를 쿵 하고 박았을 때, 이에 대하여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수용하고 용서해야 할지를 도무지 선택할 수가 없었다. 결국 가난한 1톤 트럭 기사 양반을 '용서'하고 보내주고 난 후에야 그러길 잘했다는 걸 넌지시 느꼈을 뿐이지만, 지금은 유사한 상황에 처하여도 분노는 X표, 용서가 ○표라는 것을 그냥 안다(현실적 보상 처리 따위를 무시하자는 게 아니라). 분노는 심신에 부정적 기운을 일으켜 나만 손해이고, 용서는 커다란 긍정적 기운을 일으켜 얼핏 보기에는 악운인 듯한 일을 오히려 내 자아를 고양시킬 좋은 기회로 만들어주는 지극히 유익한 행위라는 것을 '이성적으로' 알고 있다는 말이다(물론 당한 순간 그 즉시는 이 앎이 감정에 의하여 압도 당하고, 따라서 잠시 평정을 이룰 시간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나는 대체로 나에게 유익한 일들을 하고 산다. 스트레스 없고, 정신적 몰두를 방해하는 감정의 앙금도 없다. 이러한 나의 경제적 생활은 직장을 그만 두었을 당시보다 많이 나아졌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임을 나는 안다. 나는 전보다 돈을 많이 쓸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지만, 또 은행 계좌에 돈이 쌓여가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런 부족함 모르고 가족과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아내와 아이들과도 늘 사이가 좋고, 과거엔 매우 껄끄러웠던 아버지와의 관계도 차츰 좋아지고 있다. 일주일에 딱 하루 공식 외출인 강의 날은 가슴이 뛸 정도로 기다려진다. 예전엔 '내가' 멋진 선생이고 싶었으나 이제는 내가 전해줄 '메시지'가 나를 가슴 뛰게 한다. 나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행복은 달성해야 할 목적이 아니라 내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냥 행복하게 살 뿐이다.

나의 일상적 수행의 진전의 보고에는 대단하고 신비롭거나 기적적으로 보일 것이 없다. 지금의 나에겐 영계와 우주를 넘나들 신통력도 없고, 윤회와 신의 뜻 같은 신비로운 것을 이해할 능력도 없다. 그러나 그런 능력이 아직은 그다지 부럽지도 않다. 아마 지금 여기에서 하고 싶은 것들이 여전히 많아서 그런가보다. 이는 나의 영적 진화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내가 지금 늘 누리고 있는 내면의 평화는 과거의 나를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기적과 같다. 나의 길벗님들은 그런 기적을 이미 누리고 있는 분들이 많지만, '나의 이웃들'은 그러하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수행의 고급 과정에도 못 들어가고 있는 주제지만, 이웃들에게 평화를 전할 방법을 찾아내는 데 계속 관심이 많다. 이러한 내가 조금도 불만스럽지 않다 - 무지하기 때문이라 해야할지, 순진해졌기 때문이라 해야할지...

루치아노 데크레센쪼(Luciano De Crescenzo)라는 이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너의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왠지 아세요? 그것은 당신의 이웃이 문자 그대로 곁에 있는 사람이고, 지하도에서 악취를 풍기며 당신 옆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이며, 길게 늘어선 줄에서 당신 앞으로 새치기 하려드는 그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당신의 이웃이란 당신의 자유를 위협하는 그 사람입니다.

테레사 수녀께서는 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대단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우리는 지치지 말고 사랑해야 합니다. 램프가 어떻게 불타오르지요? 기름 방울이 조금씩 지속적으로 들어감으로써 타오릅니다. 이 기름 방울들은 일상의 사소한 일들입니다: 충직함, 작은 친절의 말, 다른 이들을 위하는 마음, 우리 자신만의 고요와, 우리가 바라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 등. 이것들이 우리의 삶과 관계를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계속 타고 있도록 만들어주는 사랑의 진정한 방울들입니다.

나의 이웃들에게 다가가서 평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은, 그런 행위가 살아 있으며 해볼 제일 쓸 만한 일이고, 또 실은 그밖에 달리 하고 싶은 일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이래저래 편하게 잘산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갖게 되는 지극히 나 자신을 염두에 둔 마음이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이기심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